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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0호 발행일 2008.07.01 - 맥아더와 히로히도 천황의 성경공부
  글쓴이 : KBS로고스 날짜 : 08-08-05 17:20     조회 : 1507    

맥아더와 히로히도 천황의 성경공부

<2008.7.1발행>


 1945년 9월 2일 일본 도쿄만의 미조리 함상에서 거행된 일본의 항복 조인식에서 맥아더 장군은 이제 세계는 평화가 소생했으며, 하나님께서 이 평화를 영원히 지켜주시기를 여러분과 함께 간절히 기도하자고 했다. 또한 이날 별도로 미국 국민들에게 보내는 방송 연설에서 “나를 승리로 이끌 수 있겠금 신념과 용기의 힘을 나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라고 했다.이날 항복 조인식 연설에서 맥아더는 하나님이란 단어를 여러번 사용했으며 특히 이날의 연설을 누구보다도 진지한 표정으로 경청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에 한사람이 15년전 중국 상해에서 한국인이 던진 폭탄으로 한쪽 다리를 잃고 의족으로 이날 행사에 참석한 패전국 대표인 시게미쓰 일본 외상과 그리고 20년간 외교관으로 활약했던 가세미 였다.
가세미는 이날 항복 조인식 현장 분위기를 자세하게 역사적 기록을 남긴 사람으로서 특히 맥아더의 연설장면을 주의 깊게 관찰한 사람이다. 즉 맥아더의 연설 모습에 대해 그의 얼굴에는 온화하고 평화스러운 모습에다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빛이 그의 얼굴에서 나타나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또한 일본이 미국에게 패한 것은 미국의 월등한 무기 때문만은 아닌 바로 미국 국민들의 정신력 즉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분명히 있었다고 했다.
가세미 외교관의 이 말은 승전국 대표인 맥아더의 연설을 통해서 평소 기독교 신앙에 대한 큰 감명을 받았다는 것을 암시한 말이다.
가세미 외교관이 이날 항복 조인식 현장에서 자세하게 기록한 글은 시게미쓰 외상이 직접 천황에게 문서 형식으로도 보고 되었는데, 천황은 깊은 감명을 받은 표정이었다고 기록했다.
맥아더가 군정 장관으로서 본격적인 일본 통치를 시작하자 히로히도 천황은 1945년 9월 27일 주일 미국대사관저로 맥아더 장군을 예방했다. 그런데 이날 예방에 앞서 맥아더의 참모들은 맥아더 장군의 권세를 보이기 위해 먼저 천황을 총사령부로 호출하자고 강력히 권고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그런 행동은 일본 국민들의 감정을 촉발하는 것이라고 만류했다.
그런데 얼마후 천황이 자진해서 대사관을 방문하겠다는 통보가 와서 맥아더는 천황의 예우에 대해 즉 군주에 대한 모든 예우에 만전을 기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한편 이날 맥아더와 천황의 첫 만남의 사진 한장이 전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다. 내용인즉 이 사진에서 맥아더는 넥타이도 매지 않는 군복차림인데 비해 천황은 모닝코트에 실크헤드로 정장을 했다.
거기에다 맥아더는 허리에 손을 받친체 천황을 자신의 왼쪽에 세워놓고 사진을 찍었다.
그야말로 천황의 신격(神格)이 일순간에 인간으로 강등된 초췌한 모습의 사진이었다. 그러나 이 사진이 과연 공식적 행사의 기념사진 이었을까?
지금으로부터 (2008년) 40여년전 한,미국방장관 회담이 당시 서울 후암동의 국방부 청사에서 있었다.
 20분간의 휴식시간(티 타임)이 되자 미국 국방장관의 보좌관인 한 미군장성이 잠시 휴식을 취하던 우리나라 국방장관 앞에서 군화를 신은채 책상 위에 다리를 얹어놓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동양적인 사고(思考)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잠시후 다시 회담이 시작되자 그 장성은 즉시 정중한 자세로 의자에 앉았다. 이 것은 바로 공적 자리와 사적 자리의 분명한 구분이 있음을 표하는 동서간의 현격한 문화의 차이가 있음을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필자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앞에서 언급된 천황과 맥아더의 그 화제의 사진도 공식회담이 있기 전에 아마 미국 기자들의 갑작스런 요청에 의해 의도적으로 촬영한 사진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짐(朕)은 국민과 같이 있으며 신화나 전설에 의한 신(神)이 아닌 사람이다
 
맥아더는 천황을 정중하게 영빈실로 안내하고 통역 이외에는 아무도 참석을 못하게 했다. 특히 천황으로서 패전과 항복에 대한 굴욕감으로 초췌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천황에게 담배를 권하기도 했다.
천황은 이날 맥아더를 방문한 목적을 분명하게 밝혔다. 즉 전쟁의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었으며 그 책임은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명백하게 피력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맥아더는 깊은 감동을 받았으며 천황에 대한 더없는 친밀감을 느꼈다고 했다. 또한 천황이 맥아더를 더욱 감동시킨 것이 1946년 1월 1일 천황의 칙어(勅語)였다. 그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짐(朕)은 국민과 같이 있으며 언제나 이해를 같이하고 휴척(休戚)을 나누려고 한다. 짐과 국민과의 유대는 시종 상호의 신뢰와 경애로서 맺어져 있고 단순한 신화나 전설에 의해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기록되었다.
이 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신은 이제 신(神)이 아닌 평범한 사람임을 선언한 것이다. 즉 천황으로서 신격(神格)을 부인하며 자신은 한 번도 신이 되어 본일도 없는 한사람의 인간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천황의 이 칙어를 읽어본 맥아더는 또한번 천황에 대한 뜨거운 감명을 받았다.
 
히로히도 천황과 황후의 성경공부
 
맥아더의 일본 통치 제1의 정책 목표는 일본을 기필코 기독교를 통해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 첫 번째 관문이 바로 천황이 예수님을 영접해야만 되는데 그러나 그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절대 불가능한 현실이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일본에 상륙하는 날부터 이 어려운 문제를 놓고 기도를 해왔다.
존 건서의 저서 <맥아더의 수수깨끼>에는 히로히도 천황은 만일 자신이 전쟁을 반대했다면 일본 군벌들에게 참수를 당했을 것이라고 했으며, 특히 자신은 이제부터 기독교인이 되어도 좋겠다는 뜻을 맥아더에게 솔직하게 말했다고 한다.
과거 문공부 장관과 KBS 사장을 역임한 이원홍씨는 KBS 사우회보에 기고한 글에서 일본 천황의 성경공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밝혔다.
즉 천황은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 목사를 궁성으로 불러 기독교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또한 명치시대 기독교 지도자인 우에무라 마사히사의 딸을 초빙하여 궁성 안에서 성경연구회를 계속시켰다.
특히 이 성경연구 모임에는 천황과 황후도 함께 참석하여 찬송가를 불러 궁성은 완전 기독교 분위기로 변했고 마치 구역예배를 드리는 모습이었다.
한편 주님의 교회 최명문(89歲) 박사는 천황의 기독교 사상에 더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앞서 언급된 우에무라 마사이사 이외에도 우찌무라 간조오의 영향이 더 컷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명문 박사는 특히 유영모 목사의 뒤를 이어 함석헌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우찌무라 간조오의 뜨거운 기독교 정신을 전수 받아 우리나라 기독교의 거대한 산맥을 형성했다고 강조했다.
한편 히로히도 천황 부부의 성경공부와 궁성예배는 5년간 지속되면서 천황의 기독교 신앙은 서서히 무르익어 갔다.
 
일본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기 위한 맥아더의 필사적 노력

 맥아더의 일본 기독교 복음화의 굳은 의지는 중단없이 진행되었다. 그는 미국의 기독교 단체들에게 강력하게 권고하여 1차로 180명의 선교사 입국에 이어 5년간 1,165명의 선교사가 일본에 들어왔다. 그외 미국의 카톨릭에서도 1,083명의 선교사를 보냈다.
또한 맥아더는 일본어 성경을 무려 1천만권(일부에서는 3천만권주장)을 일본 국민들에게 배포했다. 특히 이 당시 청년 선교사 빌리그래함 목사를 자주 초청하여 대중 전도 집회를 열기도 했다.
 한편 천황이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일본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아울러 천황의 예수님 영접으로 맥아더와 천황의 교분은 더욱더 두터워졌는데, 특히 천황의 아들 아기히토(현재 일본 천황 明仁)와 맥아더의 아들 아서(당시 8세)는 소꼽친구처럼 가까워졌다. 그 이유는 천황의 궁성앞에 맥아더의 사무실이 있어서 아이들은 자연히 더 자주만나 친구가 되었다.
한편 맥아더는 일본 총리에게 여성참정권 실시, 노동조합설립, 종교와 사상의 자유 등 7가지의 중요 정책을 신 헌법에 우선적으로 다루어 줄 것을 당부했다.
맥아더의 이 7가지 정책은 연합국의 승전국 중 특히 소련의 일본에 대한 공산주의 침투를 사전에 막기 위한 맥아더의 발빠른 전략이었다. 1947년 봄 맥아더는 패전국 일본에 대해 일본 국기를 게양(揭揚)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마침 회의를 주재하던 천황은 이 보고를 받고 눈물을 흘리면서 “맥아더 장군이야말로 가미가제(神風)다”라고 책상을 치며 울었다고 한다. 천황의 이 장면은 이날 회의에 참석했던 당시 농림대신이 증언해 알려진 사실이다.
빈곤과 절망에 빠져있는 일본을 꼭 재건 시키겠다는 맥아더의 일본에 대한 사랑과 평화주의 정책은 여러 분야에서도 증명되고 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사형에 처해질지도 모르는 천황을 전범으로 기소하지 못하게 한 것부터 전쟁의 잿더미에서 불사조처럼 털고 일어나 오늘의 경제대국의 원동력이된 당시 히닷치 중공업의 용광로 파괴를 저지 시켰던 일 그 중에서도 가장 비장한 결단을 내린 것이 일본 군국주의의 본산인 야스쿠니 신사를 소각해 버리자는 부하 참모들의 강력한 주장을 무마시켰던 일이다. 이 모든 맥아더의 정책은 천황 뿐만 아니라 전체 일본 국민들에게도 큰 감명을 주었다.
이상과 같은 맥아더의 이 정책의 궁극적 목표는 바로 일본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기 위한 즉 일본 국민들의 기독교에 대한 거부반응을 막기 위한 맥아더의 탁월한 선교적 차원의 전략이다.
 
원자폭판이 투하된 나가사끼에서 맥아더의 고뇌
 
 2차 대전을 종식시킨 히로시마 원폭투하 2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맥아더는 “핵무기는 인간의 지성과 이성 그리고 목적에 대한 도전이다. 이것은 히로시마가 주는 교훈이며 모든 인류를 향한 경종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이 경종과 교훈을 절대 망각되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하자”고 했다.
히로시마에 이어 두 번째 원폭이 투하된 나가사끼 공원을 찾은 맥아더는 깊은 상념에 잠겼다. 사실 제2의 원폭 투하지역으로 선정된 곳은 나가사끼가 아닌 오구리시였다. 그러나 이날 오구리시 상공은 기상 상태가 워낙 나빠서 원폭을 실은 조종사는 오구리시 상공을 무려 50회나 돌다가 결국 포기하고 제3의 후보지로 선정되었던 나가사끼에 원폭을 투하했다.
단 한 번의 섬광이 뻔쩍하는 순간 나가사끼 시민 10만명이 일순간에 몰 죽음을 당했다. 왜 오구리 시민은 살고 대신 나가사끼 시민이 죽었을까?
이날 맥아더가 깊은 상념에 잠긴 이유가 바로 이 문제 때문이었다.
한편 맥아더는 일본에 있을 때 항상 저녁 8시에 가족 기도시간을 가졌다. 짧은 성경 구절을 봉독한 후 그의 기도는 먼저 당시 8살의 아들 아서가 웨스트 포인트 생도로 선서하는 모습을 보게 될 때까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했다.
참고로 맥아더는 와인 한잔 마시는 것 이외에는 술을 전혀 마시지 않았다. 그러나 맥아더의 유머는 항상 상대방에게 기쁜 인상을 주었다.
맥아더가 아들을 위한 기도문을 만들었는데 그 기도문 중에서도 유머에 대한 것이 기록되었다. < 그 위에 유머를 알게 하시어 인생을 엄숙히 살면서도 삶을 즐길 줄 아는 마음과……>
 
풍전 등하에 놓인 한국을 구해내는 맥아더 장군
 
일본의 기독교 복음화가 활발하게 진행되던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의 6.25 남침으로 맥아더는 71세의 나이로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한국전에 참전했다.
한국의 독립을 전후해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각별한 우정을 나누었던 맥아더는 낙동강 전선의 교두보가 김일성의 한반도 적화통일의 승패와 직결된다는 것을 알고 즉각 전략을 수립한다. 그것이 바로 귀신도 몰랐다는 인천상륙 작전이다.
이 작전을 감행함으로서 계속 남진하는 공산군의 모든 군사보급로를 단숨에 차단함으로 풍전등하에 놓였던 대한민국은 기적처럼 살아난다.
김일성의 6.25 남침으로 특히 미국은 5만4천명의 꽃다운 나이의 청년들이 한국을 방어하기 위해 장렬하게 전사했다.
미국 전쟁사에 수만명이 전사한 것은 한국전 밖에는 없다.
 미국의 젊은이들이 무엇 때문에 왜 한국에서 그렇게 희생을 당해야 했을까? 그 것은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 강력하게 추진하여 만든 한,미동맹의 신뢰를 미국이 솔선수범적으로 지키기 위함이요. 또한 한국을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미국 워싱턴에는 6.25전쟁에서 전사한 미국 군인을 추모하는 한국전 참전 기념공원이 있다.
19명의 육,해,공군 장병들이 판초를 입고 경계근무를 하는 모습의 조각상이 실물처럼 보인다. <미국은 전혀 알지도 못한 나라와 한 번도 만나지 않았던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는 국가의 부름을 받고 달려갔던 자랑스러운 우리의 아들과 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자유는 결코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
미국 사람들이 이 비문 앞에서 묵념을 올리며 미국과 한국의 혈맹관계를 깊히 생각한다. 이 비문의 내용이 너무나 감동적이라는 뉴스가 퍼지면서 년간 350만명의 관광객이 이곳 한국전 참전 기념공원을 찾아와 이 비문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한때 인천 자유공원에 있는 맥아더장군 동상을 철거하겠다는 일부 단체들의 행동에 미국의 지식층과 특히 6.25참전 전사자의 가족들과 참전용사들이 경악을 했다.
 미국 국회의원들은 당시 노무현 대통령에게 철거한 동상을 파괴하지 말고 차라리 미국으로 돌려달라는 공식 서한을 보내왔다. 만일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철거되어 이곳 한국전 참전 기념공원에 세워졌을 때 그 동상을 보는 사람마다 그들이 한국이란 나라를 어떻게 말할까? 상상만해도 머리가 아찔해 진다.
 
트루만 대통령의 맥아더 장군 해임
 
맥아더의 한국전쟁 작전 수행에서 당시 트루만 대통령과 심각한 의견충돌이 자주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1950년 10월 15일 트루만은 맥아더를 웨이크 섬으로 불렀을 때 맥아더는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거수경례를 하지 않고 악수만 했다.
이 장면이 뉴스로 나가자 맥아더의 열열한 지지자들은 맥아더는 유엔군 총사령관이기 때문에 그의 상관은 트루만이 아닌 유엔사무총장이라고 어거지로 옹호했다.
 한편 그해 겨울 드디어 중공군이 한국전에 참전하자 맥아더는 과감한 극비의 전략을 수립한다. 그 것이 바로 만주지역의 중공군 기지에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한 후 고발트 전선을 구축하여 중공군의 참전을 완전히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맥아더의 이 원대한 전략은 한국 전쟁을 더 확대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트루만 대통령은 4월 11일 맥아더를 현직에서 전격 해임하고 즉시 귀국명령을 내렸다.
한편 맥아더의 해임 뉴스에 놀란 것은 미국 국민 뿐만 아니라 일본도 충격을 받았다. 사실 일본은 맥아더의 비호아래 한국전쟁의 군수물자 공급의 혜택으로 오늘의 경제대국의 기초를 만들었다.
당시 요시다시게루 총리는 6.25남침 전쟁은 한국에게는 비극이지만 일본에게는 천우신조라고 했다.
사실 6.25전쟁이 끝났을 때 일본의 수많은 공장 굴뚝마다 참새가 앉아 있는 시사만평의 그림이 그 것을 증명한 것이다.
1951년 4월 16일 맥아더가 일본을 떠나는 날 공항 연도에는 무려 25만명의 환송객이 사요나라를 외치고 있었다. 맥아더가 비행기 트랩에 오르자 군악대는 이별의 노래 올드랭 사인을 구슬프게 연주했고 맥아더는 잠시 이별의 슬픔을 참기 위해 먼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가 일본을 떠날 때 그의 마음을 어둡게 한 것 중에 하나는 그토록 심혈을 기우렸던 일본의 기독교 복음화가 서서히 식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징조는 이미 그가 한국전에 참전하는 날부터 감지되었는데 이제 자신이 일본을 떠난다면 일본은 다시 신국(神國)으로 돌아갈 것이고 야스쿠니 신사는 다시 신도(神道)들로 붐비게 될 것은 뻔한 사실이다.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
 
트루만 대통령은 4월 12일 맥아더가 휘하 부대에서 고별 연설조차 못하게 명령을 내렸으며 특히 맥아더가 미국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할 원고 내용을 입수하라는 극비 지령까지 내렸다. 그러나 그 연설 원고는 귀국 비행기 안에서 본인이 직접 작성했기 때문에 아무도 그 연설 내용을 사전에 알 수가 없었다.
이 원고에서 특히 한국을 방어하기 위한 자신의 전략을 무시한 트루만 대통령의 전쟁 수행능력에 대한 비판을 우회적으로 지적 트루만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한편 이날 연설의 백미는 후반부에 있었다. “나는 지금 막 한국에다 여러분의 자식들을 남겨두고 왔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아들들을 위해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고 있습니다. (중략)
제가 웨스트 포인트(미국사관학교) 평원에서 서약을 마친 이래 세계는 수없이 뒤바뀌어 왔고 그 희망과 꿈도 이미 오래전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 병영에서 가장 즐겨 불렀던 군가의 후렴 구절을 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 그 군가의 노병처럼 저는 이제 군인의 삶을 마감하고 다만 사라질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볼 수 있는 빛을 저에게 주셨기에 그 의무를 완수하려 했던 한 노병으로서…… 이 대목에서 그는 갑자기 목이 메어 연설이 중단되었다. 청중은 마이크가 고장난 줄 알았다.
 맥아더가 이 대목에서 왜 목이 메었을까? 즉 하나님께서 주신 의무를 완수하지 못한 것이 무엇일까?
52년간의 군대 생활 중에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우렸던 것 중에 하나는 바로 일본의 기독교 복음화가 빠질 수 없었을 것이다.
 갑작스런 해임과 귀국 명령으로 일본에 기독교 복음화의 열매를 맺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에 그는 울컥하며 눈물이 나왔을 것이다.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란 인사로 연설을 마치자 의사당은 기립박수 소리와 환호성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하원의원 듀이 쇼트는 오늘 여기서 들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직접 현신 하신 하나님의 육성이라고 외쳤다. 또한 허버트 후버는 ‘동쪽에서온 위대한 원수의 몸을 빌려 환생한 성 바오로다 라고 고함을 질렀다. 미국 전쟁사에 맥아더 만큼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지한 군인은 없었을 것이라 한다.
1944년 태평양 전쟁을 사실상 승리로 이끈 필리핀 상륙 때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가호아래 우리 부대는 드디어 필리핀에 상륙했습니다”하고 하늘을 향해 거수경례로 상륙신고를 했다.
총탄이 책상을 스쳐 벽에 박혔는데도 모르는채 그냥 집무하는 모습을 본 전속부관이 까무라 친 일도 있다.
또한 적의 매복병이 맥아더를 조준해서 발사한 박격포탄이 터질 때 모든 군인들은 웅덩이 속으로 피신했지만 맥아더는 여전히 파이프를 물고 지프차에서 망원경으로 적진을 관찰하는 모습이 당시 U.P.I 통신의 퀴크 기자의 보도로 알려졌다.
그는 아무리 위급한 상황의 비상이 걸릴 때도 항상 포켓 성경을 권총과 함께 챙겼다.
1962년 5월 12일 의무, 명예, 국가를 강조하며 “조국과 더불어 하나님과 더불어”란 미 육군사관학교에서 고별 연설을 끝으로 맥아더는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다. 1964년 4월 3일 성금요일 고요한 혼수상태로 들어가 4월 5일 미 육군병원에서 그의 위대한 생애는 끝나고 그가 평생을 사모하며 사랑했던 하나님 곁으로 갔다.
 글 김수호 (안드레명상 집필 , 주님의 교회)
※ <안드레 명상>은 필자의 동의없이 인터넷으로 무단 전재 또는 복재하면 법의 저촉을 받습니다.
 
<안드레 명상은>
안드레 명상은 1991년 당시 교회 성도들의 신앙 교양지로 출발했는데 이 글이 삽시간에 전도지로 사용되면서 전국 교회 선교회는 물론 3군 사관학교를 비롯한 군부대, 교도소, 병원, 직장신우회 그리고 해외 38개국으로 퍼저 나갔습니다. 매호 8만부가 발행되어도 그 수요를 충족치 못했습니다.
안드레 명상은 1호에서 50호까지를 모아서 국민일보와 바울서신사에서 이미 두권의 책을 발행했습니다.
한편 1998년 IMF 여파로 안드레 명상의 동역자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74호에서 발행이 중단되고 75호부터 인터넷으로 나갔습니다.
그동안 기존의 많은 독자들이 (목사, 전도사) 안드레 명상을 다시 전도지로 사용할 수 있겠끔 요청이 쇄도하여 금번 92호부터 다시 발행 했습니다.
안드레 명상은 무료로 기증되며 특히 현재는 아직 동역자가 없어 개인 자비량으로 인쇄합니다.

이 글을 보신후 버리지 마시고 꼭 권하고 싶은 분에게 이 글을 전해 주십시오.
이 한 장의 글이 앞으로 그 분의 인생관을 어떻게 변모시킬지?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안드레 명상을 전도지로 사용할 때는 전체를 그대로 복사해서 사용해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발췌 복사 사용은 금합니다.
안드레 명상은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 어디서든지 볼 수 있습니다. (www.andre.pe.kr)
안드레 명상은 KBS로고스에도 동시 게재됩니다.
(www.kbslogos.com)

발행처 : 안드레명상 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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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메일주소 : songpo83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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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제45호 (2015.6.1발행) - 한국의 거지소년 신호범의 미국 상원 5… KBS로고스 15.05.29 469
44 제44호 (2015.4.1발행) - 한국의 거지소년이 미국상원 5선의원이… KBS로고스 15.03.31 606
43 제43호 (2015.2.1발행) - 거지 소년이 미국 상원 5선의원이 되기… KBS로고스 15.02.03 697
42 제42호 (2014.12.1발행) - 입양은 축복이다. (거지 소년의 미국 … KBS로고스 14.12.04 863
41 제41호 (2014.10.1발행) - 역경을 넘고 세상의 빛으로 안면 중화… KBS로고스 14.09.30 853
40 제40호 (2014.8.1발행) - 세상의 빛으로, 고난은 축복으로 이지… KBS로고스 14.08.06 632
39 제39호 (2014.6.1발행) - 불꽃 같은 사랑과 신앙을 남기고 간 손… KBS로고스 14.06.11 739
38 제38호 (2014.4.1발행) - 성경의 진리를 실천했던 손양원 목사 6… KBS로고스 14.04.02 901
37 제37호 (2014.2.1발행) - 두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양아들로 맞이… KBS로고스 14.02.06 1261
36 제36호 (2013.10.1발행) - 여순 반란 사건으로 순교한 손양원 목… KBS로고스 13.11.29 866
35 제35호 (2013.10.1발행) - “기독교 신앙은 고난과 시련을 통해… KBS로고스 13.10.08 925
34 제34호 발행일 2013.8.1 - 고 손양원 목사가 걸어간 순교자의 길… KBS로고스 13.08.07 776
33 제33호 발행일 2013.5.30 - 나병환자들의 피고름을 빨아 주었던 … KBS로고스 13.05.31 1454
32 제32호 발행일 2013.3.30 - “폭포를 뛰어 넘는 물고기의 용기처… KBS로고스 13.04.02 835
31 제31호 발행일 2013.1.25 - 14살의 장애인 소녀가 가정부로 출발… KBS로고스 13.01.28 1066
30 제30호 발행일 2012.11.12 - 전 백악관 정책차관보 강영우 박사 … KBS로고스 12.11.16 1198
29 제29호 발행일 2012.9.1 - 맹인 고아 강영우 박사가 미국 대통령… KBS로고스 12.09.06 1298
28 제28호 발행일 2012.7.1 - 한국의 맹인 고아 강영우, 그가 미국 … KBS로고스 12.07.07 946
27 제27호 발행일 2012.4.1 - 한국의 맹인 고아 강영우, 그가 미국 … KBS로고스 12.04.19 987
26 제26호 발행일 2012.2.1 - 한국의 맹인 고아가 미국 대통령 정책… KBS로고스 12.03.03 918
25 제25호 발행일 2011.12.1 - 6.25 전쟁때 고아 하우스 보이가 미… KBS로고스 11.12.20 1462
24 제24호 발행일 2011.10.1 - 6.25 전쟁때 고아 하우스 보이가 미… KBS로고스 11.10.26 1080
23 제23호 발행일 2011.8.1 - 6.25 전쟁때 고아 하우스 보이가 미 … KBS로고스 11.08.12 1086
22 제22호 발행일 2011.6.1 - 6.25전쟁과 고아 하우스 보이가 미 백… KBS로고스 11.06.20 1392
21 제21호 발행일 2010.12.1 - 눈물로 얼룩진 나의 人生 노트 KBS로고스 11.04.07 1011
20 제20호 발행일 2010.12.1 - 전 문화부장관 이어령을 기독교인으… KBS로고스 10.12.30 1670
19 제19호 발행일 2010.9.1 - 한국의 백정(白丁) 제도를 폐지시킨 … KBS로고스 10.09.03 1763
18 제18호 발행일 2010.6.1 - 전 주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의 전쟁… KBS로고스 10.06.09 1459
17 제17호 발행일 2010.3.1 - 전 주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의 전쟁… KBS로고스 10.03.18 1603
16 제16호 발행일 2009.9.1 - 전 주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의 전쟁… KBS로고스 09.08.22 1532
15 제15호 발행일 2009.7.1 -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KBS로고스 09.06.27 1447
14 제14호 발행일 2009.4.1 - 나라가 어지러울 때 마하트마 간디의 … KBS로고스 09.04.20 1599
13 제13호 발행일 2009.2.1 - 한국인의 해외여행 “소주와 오징어 … KBS로고스 09.03.02 1799
12 제12호 발행일 2008.12.01 - 나의 사랑하는 아내 윤화영에게 KBS로고스 08.12.28 1464
11 제11호 발행일 2008.10.01 - 정명훈을 세계적 지휘자로 만든 사… KBS로고스 08.09.30 1468
10 제10호 발행일 2008.07.01 - 맥아더와 히로히도 천황의 성경공부 KBS로고스 08.08.05 1508
9 제9호 발행일 2008.05.01 -대통령의 어머니 채태원 집사의 위대… KBS로고스 08.06.11 1421
8 제8호 발행일 2007.06.01 - 어버이 살았을 때 KBS로고스 07.06.04 1443
7 제7호 발행일 2007.05.01 - 멀리 멀리 갔더니 KBS로고스 07.06.04 1529
6 제6호 발행일 2003.5.31 - 기적의 신약을 개발하고 2번의 뇌종양… KBS로고스 07.06.02 1660
5 제5호 발행일 2003.2.25 - “간단하게 두어 마디만 해” KBS로고스 07.06.02 1377
4 제4호 발행일 2002.12.20 - 권투선수 홍수환의 4전5기! 그날의 … KBS로고스 07.06.02 1678
3 제3호 발행일 2002.9.25 - 時問과 公義 KBS로고스 07.06.02 1494
2 제2호 발행일 2002.4.1 - 믿음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죽음의 길… KBS로고스 07.06.02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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