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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호 발행일 2002.4.1 - 믿음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죽음의 길…
  글쓴이 : KBS로고스 날짜 : 07-06-02 12:39     조회 : 1538    
본 내용을 저자의 동의없이 무단으로 전제 또는 복재, 살포시는 법의 저촉을받습니다.
 
믿음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죽음의 길을 선택한 순교자 주기철 목사
 
2002년 3.1절을 맞이하면서 온 국민들의 비상한 관심이 집중된 뉴스가 바로 친일파 명단 발표였다. 그 명단에는 우리가 그토록 존경했던 문화계, 언론계, 학계, 여성계 등 거물급 인사들이 포함된 것을 보고 누구나 다 놀랐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우리 국민들의 머리에 떠오른 것이 고 주기철 목사의 위대한 순교정신이다.
주기철 목사는 1897년 11월 25일 경남 창원군 웅천면 북부리에서 태어나 네 살 때부터 아버지 주현성 장로가 세운 웅천교회에 나갔으며 그곳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그런데 그가 왜 멀리 평북 정주에 있는 오산(五山)학교에 갔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춘원 이광수 때문이었다. 이광수는 그의 고향 정주에 남강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 학생모집 강연을 위해 부산에서 마산으로 향하던 중 우연히 웅천이란 곳에 들렀다.
이광수는 1906년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투철한 민족의식을 갖게 된 계몽 사상가였다. 이광수는 이날 웅천 강연에서 오산학교는 앞으로 이 나라의 애국자를 길러내는 밑거름이 될 것이며 이 나라의 운명이 바로 오산학교 학생들의 어깨에 달렸다고 열변을 토했다. 주기철 소년이 이 강연을 듣는 동안 그의 어린 가슴에는 일제의 탄압과 망국의 서러움이 서서히 분노로 끓어 오르면서 그는 오산학교 진학을 결심했다.
주기철이 오산학교에 입학했을 때 오산의 설립자요 민족의 선각자인 남강 이승훈은 이미 105인 사건으로 수감 중이었고 그 기간에 이광수가 교장 서리로 근무하고 있었다. 특히 이광수는 학생들에게 성경도 가르치면서 학생 교육에 전력을 투구했다. 그가 오산 학생들을 위해 온갖 심혈을 기울인 것은 바로 남강 이승훈의 인격적인 감화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도 훌륭한 춘원 이광수가 얼마 후 서서히 기독교 신앙생활에 변절이 오면서 친일 문학가로 돌아섰고 또한 톨스토이 사상의 심취와 자연주의 문예 사조의 유혹에 빠져 들었다.
춘원의 이 같은 영향으로 기독교적 민족구원의 투철한 정신으로 무장된 학생들까지도 흔들리기 시작했고 심지어 학생들의 예배까지도 등한히 여기게 되었다.
한편 오산학교가 주기철 소년에게 강력한 오산의 민족의식과 신앙정신을 심어준 것은 유영모 선생이었고 그 다음이 고당 조만식이었다.
오산 70년사에는 이런 글이 기록되었다. <남강은 박애와 사랑으로, 고당은 인내와 정성으로, 남강이 오산의 얼이요 겨레의 스승이라면 고당은 오산의 주춧돌이요 겨레의 등불이다 ……> 고당 조만식은 민족주의 전개에 특히 민족 경제 자립을 위해서는 물산 장려운동만이 이 민족이 사는 길이라고 외쳤다. 고당이 오산학교에 부임하여 삼일 예배 <수요예배>때 물산장려와 민족자립경제를 외치다가 갑자기 양복을 벗고 또 모자를 벗더니 “내 나라가 독립하는 날까지는 나는 절대 양복을 입지 않겠소!” 하면서 양복과 모자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그날 이후 고당은 짧은 무명 두루마기에 말총모자를 썼으며 항상 짚신을 신고 다녔다.
조만식의 모습은 조선일보 사장 시절 사진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그래서 오산학교 학생들은 고당을 그때부터 조선의 간디라고 불렀다. 지난해 (2001년 12월 29일) 인도 간디의 친손녀 바타차지가 전세계적으로 간디상 후보를 찾아 다니던 중 한국의 고당 조만식의 소문을 듣고 한국을 방문한 것도 조만식과 간디의 철학이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한편 1916년 19세의 나이로 오산학교를 졸업한 주기철은 고당과 남강으로부터 연희 전문 상과에 진학하라는 두 분의 뜻을 깨달은 주기철은 “예, 헐벗고 굶주리는 이 민족을 위해서 상과에 들어가서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서울로 와서 연희 전문에 들어갔다. 그러나 1년도 못되어서 평소 고통을 주던 안질이 악화되면서 공부는 중단되어 부득이 고향 웅천으로 내려갔다. 우울한 나날을 보내는 주기철의 마음을 더욱 괴롭힌 것은 일제의 교회 탄압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한국 청소년을 정신적 타락으로 유인하기 위해 도시마다 홍등가를 설치, 공창제를 운영했고 또한 아편 재배를 공인하고 담배 생산을 적극 장려했다. 이러한 일본의 정책적 계략을 분쇄하고자 당시 길선주 목사는 국민들이 담배를 끊고 술을 먹지 말 것을 설교 때마다 강력하게 권면했다. 그러자 일본은 총독부 수입 세원 증대에 반항하는 자라며 길선주 목사를 소요죄로 구금시켰다.
주기철을 또 한가지 슬프게 한 것은 신앙과 인격적으로 그토록 존경했던 스승 이광수가 1917년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의 글을 공개했을 때다. 춘원에게서 신앙교육을 받았던 주기철은 스승의 변절에 큰 충격을 받았다.
1993년 5월 15일 안병욱 교수는 자신이 영문학을 배운 동기는 춘원 이광수 때문이라고 방송 대담에서 비로소 밝혔다. 안병욱 교수는 이날 방송에서 그토록 존경했던 그의 스승 이광수가 감옥에서 순교하지 못하고 일제에 머리를 숙인 것에 대해 천추의 한을 남겼다고 했다. 만일 춘원이 남강 이승훈의 고귀한 뜻과 오산의 기독교적 정신으로 주기철 목사처럼 감옥에서 순교 했더라면 오늘날 춘원을 보는 역사의 시각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안병욱 교수는 “내가 그토록 존경했던 선생님의 그 주옥 같은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여 선생님을 꼭 노벨 문학상을 받게 해 드리겠다는 그 결심 하나로 학생시절 영문학 공부에 밤을 새웠다.”라고 회상했다.
나폴레옹이 종신으로 황제를 해 먹겠다고 자신이 만든 헌법에 의해 34세의 나이로 황제로 등극하던 날 나폴레옹을 평생 존경하겠다던 영국의 시인 바이런과 찬양의 심포니 영웅 교향곡을 나폴레옹에게 바쳤던 베에토벤은 악보를 찢어버리고 돌아섰다.
이처럼 존경했던 인물들이 그 시대적 사명감을 잘못 판단 변절할 때 그 추종자들의 실망이 어떠했는지는 동서 고금 역사는 적나라하게 기록했다.
만일 춘원 이광수가 친일 문학가가 되지 않고 빼앗긴 그 역사의 들판에 확실한 신앙의 씨앗만 뿌리고 갔다면 오산학교의 그 기라성 같은 수많은 제자들에 의해 춘원을 바라보는 역사의 시각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한편 청년 주기철은 만 20세가 되던 해, 서울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안갑수와 결혼하여 4남매를 두었다. 그러나 안갑수는 서른네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주기철은 부모님과 4남매를 혼자서 키우며 2년을 버티다가 오정모와 재혼을 하게 된다. 오정모는 평양 정의여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마산 의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신앙이 확고부동한 여인이었다. 바로 이 오정모 여인이 훗날 주기철을 순교반열로 인도하는 한국 기독교사에 빛나는 이름을 남기게 된다.
한편 주기철에게 본격적인 신학공부를 하게 된 계기가 생겼는데 그것은 1920년 3월 30일자 동아일보에 <부산진 교회에서 김익두 목사 부흥회 이적이 나타났다>라는 보도였다. 이 소문을 들은 주기철은 마산 문창교회에서 바로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 참여했다. 불을 토하는 것 같은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던 주기철은 이날 처음으로 말로만 들었던 성령을 받고 깜짝 놀랐다.
그리하여 주기철은 평양 장로교 신학교를 거쳐 1926년 1월 1일 부산 초량교회 목사로써 본격적인 목회시대의 막이 올랐다. 주기철 목사의 초량교회 급선무가 주일학교 성경공부 체계를 완벽하게 구축하는 일이었다. 또한 주기철 목사는 성경학원에 나가서 강사로써 청년들에게 성경공부를 통해 확실한 신앙의 뿌리를 심어주었다. 이때 학생들 중에는 순교자 손양원에서부터 이정심, 전재선, 박손혁 그리고 초량교회 양성봉, 구영기 등이 있었다.
 
주일학교 교사직분을 위해서 장관직을 사임한 양성봉 장로
 
양성봉 집사는 초량교회 주일학교 교장을 거쳐 1930년에 장로 장립을 받았으며 부산시장(1946년), 경남도지사(1949년), 농림장관(1953년)을 역임했다.
한편 주기철 목사는 주일학교 교사들을 새벽기도에 꼭 참석시키면서 주일학교 교사의 직분과 그 사명감을 항상 강조했다. 그래서 초량교회 주일학교 운영방식이 전국 교회로 퍼져나갔다. 후일 자유당 정권 때 농림장관이 된 양성봉 장로는 그때까지도 이 교회 주일학교 교사직분을 계속 수행했는데 토요일 밤 서울에서 밤차를 타고 부산까지 와서 주일학교 학생들을 가르치고 다시 밤차로 상경했다. 교회에서는 양 장로의 어려움을 알고 주일학교 교사직은 사임하고 장관직에만 전념하라고 권면했다.
어느 날 양성봉 농림장관은 경무대로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 장관직 사임서를 제출했다. 양 장관은 사임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장관직을 수행하다 보니 우리교회 주일학교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장관직을 그만두겠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기상천외한 사임 이유를 듣고 한동안 말이 없다가 “이 사람아! 남들은 장관 한번 해 먹겠다고 돈을 보따리로 싸 들고 설치는데 자네는 기껏 주일학교 선생님이 그렇게도 중요한가? 나 한가지 부탁 좀 해야겠어. 나도 교인인데 이왕 떠나는 마당에 당신은 장로니까 나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나 좀 해주구려……” 백발이 성성한 이승만 대통령은 갑자기 양성봉 장관에게 머리를 내밀었다. 한참 머뭇거리던 양 장관은 용기를 내서 이 박사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 간절한 기도를 해주었다.
다음날 양성봉 장로가 부산에 도착했을 때, 역 광장은 주일학교 학생들이 총동원되어 “장로님 만세”를 부르며 찬송가를 힘차게 불렀다. 양 장로는 감격에 못 이겨 그의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수년 전 미국의 여론조사 기관이 오늘날 미국을 움직이는 핵심 인물들을 상대로 “당신이 오늘날 출세한 배경이 무엇이냐”고 설문지를 돌렸다. 95%가 자신이 어린 시절 교회 주일학교를 다녔기 때문이라고 했으며 나머지 5%는 대통령과 평소 관계 때문이라고 했다.
카터 전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일 하루 전, 모든 선거유세 계획을 취소하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주일학교를 찾아서 교사직분을 수행했다는 뉴스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수백만 표가 열광하는 투표 전날, 최고의 황금 유세연설을 포기하고 학생들 앞에서 성경공부를 지도했다. 카터의 전 참모들은 다된 선거를 망쳤다고 책상을 치고 울분을 토했으며 미국의 주요 언론들은 일제히 카터의 불리함을 조심스럽게 관측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맡은 직분에 성실을 다한 충실한 종 카터를 미국 대통령 자리에 앉혔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깨우쳐 준 미국 대통령 역사에 잊을 수 없는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한편 양성봉 장로가 장관자리를 헌신짝 버리듯이 사임한 것은 평소 주기철 목사의 주일학교 교사직분의 중요한 철학을 철저하게 알았기 때문이다. 즉 주일학교에서 학생들이 신앙적으로 올바르게 성장해야만 이들이 장차 나라의 올바른 일꾼이 될 수 있다는 주기철 목사 주일학교 교육의 일관된 신앙철학이었던 것이다.
한편 1935년 9월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서 거행된 선교 50주년 부흥사경회에서 주기철 목사의 저 유명한 설교 일사각오(一死覺悟) 그리고 같은 해 금강산 목사 수양회 설교 <예언자의 권위>는 당시 일본 총독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특히 일본 천황을 지칭한 예언 설교는 일본 경찰의 제지로 중단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주기철 목사는 일본이 가장 싫어하는 그야말로 눈의 가시와 같은 목사가 되었다.
1936년 7월 당시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만큼 한국 기독교의 본산지가 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중심적인 교회가 산정현 교회였다. 산정현 교회 제직회는 옛 오산학교 교장이었던 조만식 장로를 주기철 목사에게 보냈다. “일제의 탄압에서 평양을 지키기 위해서 주 목사가 산정현 교회에 부임해야겠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쾌히 승낙하고 1936년 7월 마산 문창교회를 사임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고향을 뒤로하고 순교의 길 평양으로 갔다. 산정현 교회에서 그가 해야 할 첫 임무는 낡은 교회를 헐고 새로 교회 건축을 하는 일이었으며 둘째는 일본의 신사참배에 대비해 어떠한 우상에도 타협해서는 안 된다며 신앙의 정절을 기필코 사수하자고 설교를 했다.
한편 일본의 신사참배 강권은 학생들부터 실시한다는 방침이 결정되자 사립학교를 지원하던 미국의 선교단체들이 아예 학교 폐교를 결정해버린다. 서울의 연희전문을 비롯해서 정신여학교, 보성, 경신, 대구의 신명, 계성 등이다.
1938년 2월 8일 산정현 교회 헌당예배를 며칠 앞두고 일본 경찰은 뚜렷한 이유 없이 주 목사를 구속시킨다. 이것은 바로 주 목사의 신사참배 반대에 대한 입을 막기 위한 소위 주 목사 길들이기 첫 번째 구속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감명 깊게 보아야 할 내용이 주 목사의 사모 오정모가 남편의 첫 번째 출옥을 할 때의 한 말이다. “어머니와 아이들 걱정은 하지 말고 목사님은 감옥에서 순교하십시오. 목사님이 꼭 순교해야만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고 또 한국교회가 바르게 섭니다.”…… 남편의 출옥을 그 누구보다 반겨야 할 부인의 이 초인적 결단은 주기철 목사의 위대한 신앙의 보루를 지키는 최고의 후원자만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이다.
주 목사가 구속되어 있는 기간에 한국의 교계는 신사참배 가결을 선포했다. 한국 기독교 치욕의 장으로 기록된 1938년 9월 9일 제27회 한국 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 장로, 선교사, 목사 총 223명이 97명의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젊은 선교사 몇 사람만이 이럴 수가 있느냐고 고함을 치다가 경찰에 끌려 나갔다.
한편 주기철 목사는 그 이듬해 1939년 2월 의성경찰서에서 가석방이 되어 평양으로 와서 입은 옷 그대로 산정현 교회 강대상에 올랐다. 소문을 듣고 달려 온 성도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교회당을 꽉 메웠고 평양 3개 경찰서 형사들이 교회 안과 밖에 포진하고 주 목사의 설교를 기다렸다. 주 목사는 먼저 찬송을 인도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며 ……> 우렁찬 찬송은 교회를 진동시켰고 형사들은 불안한 표정이었다. 찬송이 끝나자 주기철 목사는 저 유명한 설교 <5종목의 나의 기도> 즉, 옥중에 있을 때 늘 하던 5가지 기도의 내용으로 설교를 한 것인데 이 날의 설교가 그의 유언의 설교가 된 위대한 기념비적 설교로 전해지고 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시푸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나도 어린 아들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나라의 역적으로 잡혀 죽으면 그 자식이 어디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자비하신 주님께 부탁 드립니다.」
「오, 당신 어머님을 요한에게 부탁하신 주님. 내 어머님도 부탁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늘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는 내 어머니 내 아내 내 자식들을 여러분에게 짐 되게 할 마음은 없습니다.」
「내 어머님은 나를 금지옥엽으로 길러주셨는데 춘풍추우(春風秋雨), 비바람이 옥문에 뿌릴 때 고요한 밤 달빛이 철창에 새어 들면 어머님 생각하여 눈물 뿌려 기도하였습니다. ……」 설교 도중 감격을 참지 못한 주 목사는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고 성도들의 눈물은 성경을 적시고 있었다. 설교를 계속할 수 없게 되자 주 목사는 손을 높이 들고 함께 찬송을 부르자고 했다. <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 늘 기도 힘쓰면 큰 권능 얻겠네 ……>
1939년 9월 주기철 목사는 세 번째 구속되었다. 감옥에서 그의 얼굴을 알아 본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 바로 <죽으면 죽으리라>의 안인숙 이었다. “주 목사의 얼굴은 바로 성자상과 같았다. 경찰의 고문으로 시달린 그의 형상은 주님의 십자가에 달리신 얼굴을 상상케 했다.”……
 
네 번째 구속 6년 만에 순교의 길로 들어선 주기철 목사
 
1940년 동아, 조선일보가 폐간되고 주 목사의 산정현 교회 목사직도 박탈 당했으며 곧 창씨 개명이 시작되었다. 주 목사는 1940년 4월에 잠시 석방되었다가 9월에 네 번째 구속된다. 일제는 주 목사를 세 번째 석방을 통해 세상의 평안과 가족재회의 기쁨을 유혹했지만 실패하자 네 번째 구속에는 장장 4년 가까이 감옥에서 보내게 했다. 그때도 만일 주 목사가 “신사참배 반대 안 하겠소.” 이 말 한마디면 당장 사랑하는 가족과 편안한 생을 보낼 수 있었지만…… 장기간의 감옥생활로 이제 자신이 죽음에 가까워 온 것을 느낀 주 목사는 한국인 간수를 통해 극 비밀리에 그의 유언서를 집으로 보냈다.
“여드레 후에는 아무래도 소천할 것 같습니다. 막내 광조에게 생명보험 든 2백 원으로 공부를 시키시오. 어머님 봉양 잘 하시고 ……”
4월 21일 부인 오정모 사모는 마지막 면회를 갔다. 간수의 등에 업혀 나온 남편의 모습을 보는 순간 “육신은 다 말라 버렸으나 영광의 면류관은 더 가까이 왔구나” 하는 것을 금방 느낄 수가 있었다고 했다. 심한 고문으로 몸이 찢기고 손톱, 발톱 다 빠져버렸고 수십 번이나 기절을 해서 육체는 말 그대로 산 송장이었다고 했다.
평양 형무소장은 주 목사의 죽음이 목전에 온 것을 알고 이날 마지막 면회를 주선, 병 보석으로 강제 퇴소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오정모 사모는 만단설움이 북받쳐 오르는 것을 굳게 참고 조용한 음성으로 남편에게 “당신은 꼭 승리해야 합니다. 살아서는 이곳을 못 나옵니다.”……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가슴을 떨면서 토해낸 이 말에 주 목사는 용기를 얻은 듯 “그렇소,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오. 나는 오래지 않아 주님 앞으로 갑니다. 어머니와 어린 자식을 잘 부탁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면 산정현 교회와 조선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겠소. 내 죽음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지기를 원합니다. 나를 웅천에 보내지 말고 평양 돌박산에 묻어 주시오. 마지막 부탁이 있소. 따뜻한 숭늉 한 사발 먹고 싶소.”……
이날 평양 형무소는 오정모 사모에게 다시 한번 주 목사의 병원 입원을 간곡하게 부탁했지만 오정모 사모는 “안 모시고 가겠습니다”하고 매정하게 거절해 버렸다. 지구상에 감옥소가 생긴 이래 이런 면회장면이 또 있었을까? 주 목사는 마지막이 된 이날 면회에 혹시나 노모가 나왔을까? 그리고 보고 싶은 어린 아이들도 나왔을까? 실낱 같은 희망이 있었던지 그의 얼굴에는 슬픔과 애통함이 역력히 보였다고 한다.
마지막 면회가 있고 난 다음날 즉 해방을 1년 앞둔 1944년 4월 21일 주님의 고난 당한 바로 금요일 밤 9시 겨레의 선한 목자 주기철 목사는 “내 영혼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라는 마지막 기도소리를 남긴 채 47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주기철 목사 기념관과 동상 건립을 못하는 이유
 
해방이 된 다음해 1946년 산정현 교회 당회에서는 주기철 목사 순교 기념관과 동상을 교회 정원에 세우기로 결정했다. 이 소식을 들은 오정모 사모는 급히 교회로 뛰어가 당회 결정을 취소하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즉 당회 결정은 주 목사님이 생전에 가장 싫어했던 바로 그 자신이 우상화가 될 수 있기 때문이라며 절대 반대한다고 했다. 그래서 후일 오정모 사모는 임종 직전 아들 주광조(현재 극동방송 고문)에게도 앞으로 세월이 흐른 후에라도 어떤 단체에서든지 아버지의 기념관, 동상은 절대 세우지 못하게 하라고 유언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국내 여러 신학대학에서 주기철 목사 기념관 건립을 하겠다는 의사를 알려오지만 주광조 장로는 정중히 거절한다고 했다. 주 장로는 지난번 (2002. 1. 9) 필자에게도 이 사실을 분명히 밝혀 주었다. 그렇다. 기독교는 우상을 절대 금지한다. 구약성경 십계명 제2조는 하나님께서 우상숭배의 경고를 분명하게 기록했다.
안병욱 교수는 <현대인의 우상>이란 글에서 우상은 무지(無智)의 밭에서 편견(偏見)의 비료로 성장하는 허구(虛構)의 나무다. 이 나무에는 미신의 꽃이 피고 맹종(盲從)의 열매가 맺고 다소의 권위의 냄새가 풍긴다. 인간은 우상건설 우상숭배 우상파괴를 되풀이 한다고 기록했다.
한편 필자는 주광조 장로에게 한가지 질문을 했다. “당시 산정현 교회에서 지난날을 사과한다면서 유족에게 토지를 사 주겠다고 했고 또 북한정권에서도 항일투쟁에 대한 포상과 토지를 주었다고 했는데 사실입니까?” 주 장로는 “장로님, 잘 못 알고 있습니다. 정확히 아셔야 합니다. 1946년 당시 북한 공산정권에서 김일성 장군 명의로 주기철 목사님 항일투쟁을 보상한다면서 일본집(적산가옥) 2층집 한 채와 강서군 소재 2만 6천 평의 토지문서, 그리고 돈이 가득히 담긴 박스 한 개를 가지고 왔습디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것을 되돌려주면서 우리 목사님은 항일투사가 아닙니다. 다만 성경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마귀를 배격했을 뿐 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절대 받을 수 없다고 하면서 돌려 보냈습니다.
그때 나는 중학교 1학년 이었습니다.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 진학은 꿈도 못 꾸는 판이라 나는 어머니께 울면서 막 대들었습니다. 내 공부는 누가 시켜 줍니까? 그 돈으로 고등학교도 대학도 가야 합니다! 왜 돌려 주어야 합니까? 울며 불며 한참 동안 어머니께 심한 반박을 했지만 그러나 어머니의 의지는 결국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님의 임종이 가까워오던 어느 날 어머님은 나를 꿇어 앉게 하시더니 성경을 펴서 시편 37장 25절과 26절을 힘없는 음성으로 읽어 주셨습니다. <착한 사람이 버림 받거나 그 후손이 구걸하는 것을 나는 젊어서도 늙어서도 보지 못하였다. 그런 사람은 언제나 선선히 꾸어주고 살고 그 자손은 축복을 받으리라> (현대인의 성경) 이 구절을 읽어주신 어머니는 내가 너에게 주고 갈 유산은 이 성경 구절 밖에 줄 것이 없구나. …”
주광조 장로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필자는 비록 생모는 아니지만 주 장로는 훌륭한 신앙의 어머니 곁에서 자랐구나 하는 부러운 생각을 했다.
한편 우리 정부는 1968년 3월 1일 고 주기철 목사에게 결국 공로상을 수여했고 국립묘지에 주 목사의 묘지를 만들어주었다. 끝으로 고 주기철 목사 순교의 뒤안길에는 구레네 시몬과 같은 오정모 사모의 피눈물의 기도와 뼈를 깎는 인간의 고통을 이겨냈다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도 언급된 그 마지막 면회 때만 해도 남편을 집으로 무셔와 편안하게 죽게 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주 목사를 떳떳한 순교의 길로 가게끔 비장한 결단을 내린 그날의 오정모 사모! 세상의 불신자들은 오정모 사모를 독한 여자라고 평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의 이름 오정모가 주기철 목사 순교와 함께 바늘에 실 가듯이 한국 기독교사에 항상 등장하고 있다.
1947년 1월 27일 오정모 사모는 유방암으로 투병 중 새벽기도회를 보다가 쓰러져 주기도문을 외우며 눈을 감았다. 그의 유해는 평양 돌박산 남편 묘 옆에 나란히 묻혔다. 그날 멀리 서기산에는 난데없이 아름다운 무지개가 영롱하게 떠 올랐다고 한다.
<끝>
 
 글 : KBS로고스 김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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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제58호 (2017.10.1발행) - 전 유럽을 호령했던 나폴레옹과 그 어… KBS로고스 17.10.18 8
57 제57호 (2017.7.1발행) -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가 이땅에… KBS로고스 17.06.30 34
56 제56호 (2017.4.1발행) - “유한양행은 유씨가 사장이 될 수 없… KBS로고스 17.04.26 51
55 제55호 (2017.2.1발행) -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위대… KBS로고스 17.03.02 83
54 제54호 (2016.12.1발행) - 소아마비의 몸으로 (반신불수) 미국의… KBS로고스 16.12.20 122
53 제53호 (2016.10.1발행) - 밀림의 성자, 지성의 선구자 알베르트… KBS로고스 16.10.14 139
52 제52호 (2016.8.1발행) - 미국 이민 100년사 3대 인물 신호범 전… KBS로고스 16.08.08 157
51 제51호 (2016.6.1발행) - 60 나이에 워싱톤주 하원의원에 출마한… KBS로고스 16.06.09 201
50 제50호 (2016.4.1발행) - 미국 한인 사회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KBS로고스 16.04.06 221
49 제49호 (2016.2.1발행) - 침을 뱉고 떠난 조국에 대학 교수가 … KBS로고스 16.02.04 402
48 제48호 (2015.12.1발행) - 소년거지 신호범이 미국상원 5선 의원… KBS로고스 15.12.08 345
47 제47호 (2015.10.1발행) - 서울 남대문시장 거지소년 신호범의 … KBS로고스 15.10.06 404
46 제46호 (2015.8.1발행) - 서울 남대문 거지 소년이 미국 상원 5… KBS로고스 15.08.04 436
45 제45호 (2015.6.1발행) - 한국의 거지소년 신호범의 미국 상원 5… KBS로고스 15.05.29 469
44 제44호 (2015.4.1발행) - 한국의 거지소년이 미국상원 5선의원이… KBS로고스 15.03.31 607
43 제43호 (2015.2.1발행) - 거지 소년이 미국 상원 5선의원이 되기… KBS로고스 15.02.03 698
42 제42호 (2014.12.1발행) - 입양은 축복이다. (거지 소년의 미국 … KBS로고스 14.12.04 864
41 제41호 (2014.10.1발행) - 역경을 넘고 세상의 빛으로 안면 중화… KBS로고스 14.09.30 854
40 제40호 (2014.8.1발행) - 세상의 빛으로, 고난은 축복으로 이지… KBS로고스 14.08.06 633
39 제39호 (2014.6.1발행) - 불꽃 같은 사랑과 신앙을 남기고 간 손… KBS로고스 14.06.11 739
38 제38호 (2014.4.1발행) - 성경의 진리를 실천했던 손양원 목사 6… KBS로고스 14.04.02 901
37 제37호 (2014.2.1발행) - 두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양아들로 맞이… KBS로고스 14.02.06 1261
36 제36호 (2013.10.1발행) - 여순 반란 사건으로 순교한 손양원 목… KBS로고스 13.11.29 867
35 제35호 (2013.10.1발행) - “기독교 신앙은 고난과 시련을 통해… KBS로고스 13.10.08 925
34 제34호 발행일 2013.8.1 - 고 손양원 목사가 걸어간 순교자의 길… KBS로고스 13.08.07 776
33 제33호 발행일 2013.5.30 - 나병환자들의 피고름을 빨아 주었던 … KBS로고스 13.05.31 1455
32 제32호 발행일 2013.3.30 - “폭포를 뛰어 넘는 물고기의 용기처… KBS로고스 13.04.02 836
31 제31호 발행일 2013.1.25 - 14살의 장애인 소녀가 가정부로 출발… KBS로고스 13.01.28 1066
30 제30호 발행일 2012.11.12 - 전 백악관 정책차관보 강영우 박사 … KBS로고스 12.11.16 1199
29 제29호 발행일 2012.9.1 - 맹인 고아 강영우 박사가 미국 대통령… KBS로고스 12.09.06 1299
28 제28호 발행일 2012.7.1 - 한국의 맹인 고아 강영우, 그가 미국 … KBS로고스 12.07.07 946
27 제27호 발행일 2012.4.1 - 한국의 맹인 고아 강영우, 그가 미국 … KBS로고스 12.04.19 988
26 제26호 발행일 2012.2.1 - 한국의 맹인 고아가 미국 대통령 정책… KBS로고스 12.03.03 918
25 제25호 발행일 2011.12.1 - 6.25 전쟁때 고아 하우스 보이가 미… KBS로고스 11.12.20 1463
24 제24호 발행일 2011.10.1 - 6.25 전쟁때 고아 하우스 보이가 미… KBS로고스 11.10.26 1081
23 제23호 발행일 2011.8.1 - 6.25 전쟁때 고아 하우스 보이가 미 … KBS로고스 11.08.12 1086
22 제22호 발행일 2011.6.1 - 6.25전쟁과 고아 하우스 보이가 미 백… KBS로고스 11.06.20 1393
21 제21호 발행일 2010.12.1 - 눈물로 얼룩진 나의 人生 노트 KBS로고스 11.04.07 1011
20 제20호 발행일 2010.12.1 - 전 문화부장관 이어령을 기독교인으… KBS로고스 10.12.30 1670
19 제19호 발행일 2010.9.1 - 한국의 백정(白丁) 제도를 폐지시킨 … KBS로고스 10.09.03 1764
18 제18호 발행일 2010.6.1 - 전 주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의 전쟁… KBS로고스 10.06.09 1460
17 제17호 발행일 2010.3.1 - 전 주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의 전쟁… KBS로고스 10.03.18 1603
16 제16호 발행일 2009.9.1 - 전 주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의 전쟁… KBS로고스 09.08.22 1533
15 제15호 발행일 2009.7.1 -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KBS로고스 09.06.27 1448
14 제14호 발행일 2009.4.1 - 나라가 어지러울 때 마하트마 간디의 … KBS로고스 09.04.20 1600
13 제13호 발행일 2009.2.1 - 한국인의 해외여행 “소주와 오징어 … KBS로고스 09.03.02 1799
12 제12호 발행일 2008.12.01 - 나의 사랑하는 아내 윤화영에게 KBS로고스 08.12.28 1465
11 제11호 발행일 2008.10.01 - 정명훈을 세계적 지휘자로 만든 사… KBS로고스 08.09.30 1469
10 제10호 발행일 2008.07.01 - 맥아더와 히로히도 천황의 성경공부 KBS로고스 08.08.05 1508
9 제9호 발행일 2008.05.01 -대통령의 어머니 채태원 집사의 위대… KBS로고스 08.06.11 1422
8 제8호 발행일 2007.06.01 - 어버이 살았을 때 KBS로고스 07.06.04 1444
7 제7호 발행일 2007.05.01 - 멀리 멀리 갔더니 KBS로고스 07.06.04 1530
6 제6호 발행일 2003.5.31 - 기적의 신약을 개발하고 2번의 뇌종양… KBS로고스 07.06.02 1661
5 제5호 발행일 2003.2.25 - “간단하게 두어 마디만 해” KBS로고스 07.06.02 1377
4 제4호 발행일 2002.12.20 - 권투선수 홍수환의 4전5기! 그날의 … KBS로고스 07.06.02 1679
3 제3호 발행일 2002.9.25 - 時問과 公義 KBS로고스 07.06.02 1495
2 제2호 발행일 2002.4.1 - 믿음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죽음의 길… KBS로고스 07.06.02 1539
1 제1호 발행일 2002.2.1 - 대통령이 친히 권하는 축하의 술잔을 … KBS로고스 07.06.02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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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로고스 / 저자:김수호 / 관리자이메일주소 : songpo83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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